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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에 머물러 가만히 들어주는 미술치료사

7분 읽기

누군가 힘든 이야기를 꺼낼 때면 마음이 먼저 움직입니다. 도움이 되는 말을 건네고 싶고, 조금이라도 빨리 편안해질 길을 함께 찾고 싶어집니다. 미술치료사인 저에게도 이런 마음이 있습니다.

코리 도어펠드의 그림책 《가만히 들어주었어》를 읽으며, 그 마음의 속도를 다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책 속 테일러는 정성껏 쌓은 블록 작품이 무너진 뒤 큰 상실감에 잠깁니다. 여러 동물이 찾아와 자기 방식으로 테일러를 돕고자 합니다. 닭은 이야기를 꺼내 보라고 하고, 곰은 함께 화를 내자고 하며, 코끼리는 다시 만들어 보자고 합니다. 모두 선한 마음으로 다가왔고, 테일러에게는 자기 마음이 움직일 시간이 먼저 필요했습니다.

마지막에 찾아온 토끼는 테일러의 곁에 조용히 앉습니다. 가까이 머물고, 테일러가 말할 때 귀를 기울입니다. 테일러는 준비된 만큼 자신의 이야기를 꺼냅니다. 슬픔과 분노를 충분히 표현한 뒤에야 다시 무언가를 해 보고 싶은 마음을 만납니다.

좋은 뜻도 한 사람의 속도 안에서 전해집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오래 머물렀습니다.

치료실에 오는 한 사람도 자신의 이야기를 품고 옵니다. 말로 또렷하게 설명할 수 있는 마음이 있고, 아직 이름을 찾는 중인 감정도 있습니다. 종이를 고르는 데 시간이 걸리기도 하고, 한동안 매체를 바라보기만 하기도 합니다. 짧은 선 하나를 그은 뒤 손을 멈추는 날도 있습니다.

그 순간 치료사는 여러 가능성을 떠올립니다. 어떤 질문을 건넬지, 어떤 매체를 제안할지, 지금의 표현을 어떻게 이해할지 생각합니다. 이 전문적인 판단과 함께 제가 계속 지키고 싶은 태도가 있습니다. 한 사람의 표현과 같은 속도로 걸으며 지금 이 자리에서 들려오는 것을 충분히 듣는 태도입니다.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이 클수록 답을 서둘러 찾을 때가 있습니다. 《가만히 들어주었어》의 토끼는 도움의 시작이 곁에 머무는 일일 수 있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상대의 마음이 스스로 움직일 시간까지 함께 지키는 것입니다.

미술치료에서는 침묵도 표현의 일부가 됩니다

미술치료실에서는 말과 침묵, 이미지와 몸의 반응까지 함께 듣습니다.

치료사는 손의 움직임과 호흡, 색을 고르는 시간, 화면에 남겨 둔 빈자리도 함께 살핍니다. 매체를 강하게 누르는 순간과 힘을 빼는 순간, 완성한 작품을 가까이 두고 싶은 마음과 잠시 덮어 두고 싶은 마음을 존중합니다.

작품은 말이 준비되기 전부터 이야기를 품을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색과 선으로 마음을 표현하는 동안 치료사는 그 이미지가 안전하게 머물도록 곁을 내어 줍니다. 의미는 한 사람과 함께 천천히 발견합니다.

“이 부분을 바라보면 어떤 느낌이 드나요?”

“지금은 이 작품과 어느 정도 거리에 있고 싶나요?”

“조금 더 머물고 싶은가요, 여기에서 마무리하고 싶은가요?”

이런 질문도 한 사람의 반응을 기다릴 때 비로소 대화가 됩니다. 질문 뒤의 침묵까지 함께 품을 수 있어야 합니다.

듣는 일은 치료사의 꾸준한 성찰과 이어집니다

저는 회기가 끝난 뒤 반응작업을 이어 갑니다. 치료 장면에서 마음에 남은 색이나 형태를 제 손으로 다시 표현해 봅니다. 작품을 바라보며 제가 어느 순간 조급해졌는지,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이 한 사람의 속도보다 빨라지지는 않았는지, 어떤 감정을 함께 견디기 어려워했는지 살핍니다.

외부 전문가와의 슈퍼비전에서도 이런 장면을 나눕니다. 제가 들은 내용과 함께 치료 관계 안에서 제 마음이 어떻게 반응했는지 돌아봅니다. 이 성찰은 다음 회기에서 더 차분히 듣고, 필요한 순간에 적절한 구조와 매체를 제안하는 힘이 됩니다.

가만히 들어주는 태도에는 한 사람의 말과 침묵, 작품과 몸의 반응을 세심하게 따라가는 적극적인 만남이 담겨 있습니다. 치료사는 안전과 치료 목표를 살피며 회기의 틀을 지키고, 참여자가 자신의 속도로 표현할 수 있도록 안정된 관계를 만듭니다.

제가 되고 싶은 미술치료사의 모습

《가만히 들어주었어》를 덮고 난 뒤에도 토끼가 테일러 곁에 앉아 있는 장면이 마음에 남았습니다.

저도 그런 미술치료사가 되기 위해 노력합니다. 지금의 마음이 충분히 표현될 수 있도록 곁을 지키겠습니다. 말이 찾아오면 귀 기울여 듣고, 이미지가 먼저 나타나면 함께 바라보며, 침묵이 필요하면 그 시간을 존중하겠습니다.

한 사람에게는 이미 자기 마음을 느끼고 표현하며 다음 걸음을 선택할 힘이 있습니다. 치료적 관계는 그 힘이 안전하게 나타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합니다. 저는 미술치료의 매체와 관계 안에서 그 자리를 정성껏 지켜 가고 싶습니다.

오늘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생긴다면, 잠시 곁에 머물러 보아도 좋겠습니다. 고요한 시간 속에서 그 사람에게 꼭 필요한 말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미술치료의 의미와 진행 과정은 미술치료란?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현재 상황에 맞는 상담 가능 여부는 첫 상담 예약에서 문의해 주세요.


책 정보

  • 제목: 《가만히 들어주었어》
  • 원제: The Rabbit Listened
  • 글·그림: 코리 도어펠드(Cori Doerrfeld)
  • 옮긴이: 신혜은
  • 출판사: 북뱅크
  • ISBN: 978-89-6635-100-8

도서정보 및 표지 출처

고은별

고은별

ACT ART CENTER 대표 · MA (박사과정)

세 아이의 어머니이자 미술과 심리치료를 연결하는 전문가. 예술적 감수성과 임상적 통찰을 바탕으로 지속 가능한 심리적 성장을 돕는 미술치료를 지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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