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증 질환을 겪는 아이가 종이 위에 집과 나무, 해와 비, 배와 새를 그립니다. 치료자는 그 그림 앞에서 무엇을 보아야 할까요. 색과 형태의 의미를 곧바로 찾고 싶어질 수도 있지만, 아이가 그림을 그린 날의 몸 상태와 병실의 분위기, 앞뒤 그림에서 달라진 부분까지 함께 살피는 일이 먼저일 것입니다.
수잔 바흐의 《소아암 중환아의 그림과 미술치료》를 읽으며 저는 한 장의 그림을 해석한다는 일이 얼마나 긴 관찰과 책임을 필요로 하는지 다시 생각했습니다.
수잔 바흐는 결정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정신분석가로 활동하며 중증 질환 아동의 자발적 그림을 연구했습니다. 이 책은 아동이 스스로 그린 그림을 수집하고 관찰하는 방법부터 색, 방향, 반복되는 숫자, 생략된 부분과 덧칠, 연작의 변화까지 체계적으로 다룹니다.
책에서 확인한 핵심 내용
책의 첫 부분은 자발적 그림을 어떻게 수집하고 기록할 것인지 설명합니다. 한 작품만 떼어 보는 방식보다 여러 그림이 이어지는 과정과 그림이 만들어진 환경을 함께 살핍니다. 작품의 제목, 당시 상황, 눈에 띄는 요소, 반복과 생략을 기록하며 아이의 표현이 시간에 따라 어떻게 움직이는지 관찰합니다.
이어지는 장에서는 집, 나무, 난쟁이, 사다리, 비, 무지개, 새, 태양 같은 모티브와 색의 사용을 살펴봅니다. 저자는 이를 단순한 상징 사전처럼 제시하기보다 개별 아동의 병력과 연작, 주변 상황 안에서 읽어 가려 합니다. 같은 모티브도 아이와 시점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신과 신체의 관계를 그림에서 어떻게 관찰할 수 있는지도 책의 큰 축입니다. 소아 백혈병 사례를 비롯한 중환아의 그림을 통해 심리적 경험과 신체 상태가 시각적 표현 속에서 어떤 관계를 맺는지 탐색합니다. 이러한 관찰은 아이의 경험을 더 세심하게 이해하기 위한 임상 자료로 다루는 편이 적절합니다.
후반부의 ‘일반화와 오역의 위험’, ‘관찰자의 자기 방어’라는 주제도 오래 남습니다. 그림을 보는 치료자의 기대와 두려움이 해석에 스며들 수 있으며, 해석하는 사람 역시 자신의 반응을 돌아봐야 한다는 뜻으로 읽었습니다. 저자는 자발적 그림이 환자와 가족, 의료진과 돌봄 인력을 연결하는 다리가 될 수 있다는 점도 이야기합니다.
제가 이 책에서 오래 머문 지점
저는 ‘그림을 잘 읽는 치료자’보다 ‘한 사람의 그림을 오래 지켜볼 수 있는 치료자’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현장에서는 눈에 띄는 색이나 상징을 만나면 의미를 빠르게 붙이고 싶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빨간색 하나, 작게 그린 사람 하나만으로 아이의 마음이나 질병 상태를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림을 그린 순서, 아이가 들려준 말, 선택한 미술 매체, 작업 속도, 치료자와의 관계, 그날의 신체 상태가 함께 기록될 때 비로소 이해의 실마리가 생깁니다.
이 책이 말하는 체계적인 관찰은 아이의 표현을 함부로 단정하지 않기 위해 더 오래 보고, 더 정확히 기록하는 태도에 가깝습니다. 치료자가 미술 매체를 제안할 때에도 치료적 근거와 안전, 아이의 상태와 치료 목표를 살피며 선택권이 살아 있는 구조를 마련해야 합니다. 매체는 아이가 자신의 경험을 표현하도록 돕는 든든한 도우미가 되어 줍니다.
특히 중환아의 그림을 마주할 때는 치료자 자신의 불안도 함께 살펴야 합니다. 죽음과 상실을 암시하는 듯한 장면을 보았을 때 성급하게 의미를 확정하면, 아이가 실제로 들려주려던 이야기를 놓칠 수 있습니다. “이 그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니?”, “이 색을 고를 때 어떤 느낌이었니?”처럼 아이의 언어를 초대하는 질문이 해석보다 앞에 놓여야 합니다.
미술치료 현장과 연구에 연결해 본 생각
이 책은 임상 기록의 중요성을 다시 확인하게 합니다. 작품 사진과 함께 제작 날짜, 미술 매체, 작업 시간, 아이의 말과 행동, 치료자의 관찰, 의료적·환경적 변화를 남긴다면 연작의 흐름을 더 충실하게 살필 수 있습니다.
연구에서도 같은 원칙이 필요합니다. 그림의 형식적 특징만 부호화하기보다 참여자의 설명과 치료 과정 기록, 의료진과 보호자의 관찰을 함께 수집하는 질적 설계가 어울립니다. 여러 자료를 교차해 살피면 연구자의 해석이 지나치게 앞서는 일을 줄이고, 아이가 자신의 경험에 부여한 의미를 더 가까이 담을 수 있습니다.
또한 소아암과 완화의료 현장의 미술치료는 아이가 두려움과 희망, 몸의 변화와 관계의 기억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현하도록 곁을 내어 주는 일입니다. 그림은 때때로 말보다 먼저 아이의 이야기를 건넵니다. 치료자는 아이와 함께 의미를 확인하고 안전하게 연결합니다.
책장을 덮으며 이런 질문이 남았습니다.
나는 작품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속도보다 한 사람의 이야기를 기다리는 시간을 충분히 지키고 있는가. 내가 본 상징과 그 사람이 경험한 의미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 그림을 바라보는 동안 올라오는 나 자신의 두려움과 기대도 정직하게 살피고 있는가.
《소아암 중환아의 그림과 미술치료》는 중환아의 그림을 쉽게 설명해 주는 책이라기보다, 한 아이의 그림 앞에서 치료자가 가져야 할 관찰의 깊이와 윤리적 태도를 묻는 책이었습니다. 그림을 해석하기에 앞서 아이를 만나고, 한 번의 인상보다 시간 속의 변화를 살피는 것. 제가 이 책에서 다시 배운 미술치료의 기본입니다.
아동·청소년의 발달 단계와 속도를 존중하는 미술치료는 아동·청소년 미술치료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현재 상황에 맞는 상담 가능 여부는 첫 상담 예약에서 문의해 주세요.
책 정보
- 제목: 《소아암 중환아의 그림과 미술치료》
- 저자: 수잔 바흐(Susan Bach)
- 옮긴이: 정여주·서하나·이성령 외
- 출판사: 학지사
- 발행: 2025년 2월 25일
- ISBN: 978-89-997-3321-5
서지 및 내용 확인

ACT ART CENTER 대표 · MA (박사과정)
세 아이의 어머니이자 미술과 심리치료를 연결하는 전문가. 예술적 감수성과 임상적 통찰을 바탕으로 지속 가능한 심리적 성장을 돕는 미술치료를 지향합니다.
